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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미스테리 돼지를 사랑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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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와 사랑한 남자

 멜로디데이 님의 '돼지와의 x스'

 

 


따분한 일상은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오지만, 그 중에는 뜻하지 않은 방문이 껴있는 날도 있다.
예를 들면 바로 그 날, 의안군청 축산자원과, 가축방역팀, 김영범 주무관을 찾아온 손님이 그러했다.
의안군 의회 소속 군 의원이자 '의안군에서 가장 못 생긴 남자'로 잘 알려진 한달구 의원이 찾아온 것이다.

" 아, 의원님께서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

" 김영범 주사 맞지요? 아.. 수고 많죠? 다름이 아니고 축산업과 관련해서 작은 부탁이 하나 있어서 그래요. "

" 부탁이요? "

한달구 의원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땅 놀이를 잘한 덕에 부를 쌓았지, 농업이나 축산업 쪽으로는 재주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영범이었기에 더욱 의아했다.

" 그.. 돼지를.. 개인적으로 한 마리 구하고 싶어서 그래요. "

" 돼지요? 잔치에 사용하실 겁니까? "

" 아니, 키워보려고 그럽니다. "

" 아-.. 그게, 앞으로는 좀 까다로워질텐데요. "

" 그, 허가제- 말이죠? "

" 아시네요. 이제 법이 까다로워져서, 아무렇게나 키우려고 해도 허가를 받아야 사육이 가능합니다.
옛날처럼 집에서 닭 열 마리, 돼지 한 마리, 소 한 마리 찔끔찔끔 키울 수가 없구요.. 기준에 따른 설비를
갖추어야 하고, 교육도 이수해야 하고, 매번 군청에서 전화 오고, 점검 오고, 아주 난리도 그런 생난리가 없습니다. "

" 까짓거 허가 받지요. 그럼 되겠습니까? "

" 예에? 진심이십니까? "

" 아.. 뭐.. 어쩔 수 없다고 하니깐.. "

" 그래도 키우신다구요? 한 마리로는 새끼도 제대로 못 치잖아요. 돈도 안 되는데, 먹이는 또 얼마나 먹는다구요. "

" 김 주사. 나 그런 건 알아서 할테니까, 돼지 한 마리만 좋은 걸로 알아봐줘요. "

" 하아.. "

" 어려운 부탁 아니잖아, 우리 관내에 돼지가 몇 마리인데.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소개만 시켜달라는거에요. "

" 알겠습니다. 까짓거 하려고 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거든요. 허가도 받으신다니까 제가 더 관여할 문제도 아니겠죠. "

" 고마워요. 살이 잘 오른 놈이면 좋겠는데, 살집이 좀 두툼하게 오른 녀석으로.. 아, 암컷입니다. 무조건. "

" 무조건 암컷이요..? 그러니까 어미돼지, 즉 모돈을 구해달라는 말씀인데. 좋은 모돈이면 당장에 구해지진 않습니다. 의원님. "

" 우리 군에서 최고로 치는 모돈이 얼마 정도 나갑니까? "

영범이 달구 의원의 귀에 대고 속닥이자 달구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럼 그거보다 딱 이백만원 더 쳐준다고 하면 되겠지요. "

" 굳이 또 그러실 필요는 없구요..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 정말 마음에 드는 녀석 구하면 보답할테니까 잘 부탁해요. "

" 예. 곧 연락드릴테니 조심해서 들어가십쇼. "

달구 의원을 문앞까지 배웅한 영범이 자리에 앉자 같은 팀 차석으로 일하는 수의직 공무원 수아가 바짝 다가왔다.

" 달구 의원 돼지 키운다고? "

" 그렇다는데. 무슨 속셈인지 몰라.. 한 마리만 있어도 백 마리 있는 농가랑 일은 똑같이 해줘야 하는데 진짜 귀찮게 됐네.
그냥 돼지가 필요하면 사다먹든가. 무슨 한 마리야. 외로우면 개나 키우던지. "

" 오올- 영범 씨 입에서 그런 말도 나와? 스트레스 좀 받나봐? 허가야 뭐 우리가 내주나, 다른 팀에서 내주는데.
어쨌든 거기도 백신 항체 신경써야하는 건 똑같으니까 우리로서도 성가신 건 맞네. "

" 아. 짜증나. 물론 잘못된 건 아냐, 허가도 받겠다니까 막을 수도 없고. 그냥 돼지 구해주는 게 짜증나네.
비리비리한 거 구해주면 의회 예산 통과시킬 때 눈치 보일거고 좋은 거 구해주자니 그게 내가 말한다고 뭐 쉽게 구해지나. "

" 못 한다고 그러지 왜, 킥킥. "

" 어떻게 그래? 안 그래도 의원들 요즘 우리 과 예산 깎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보고 있는데. "

" 잘해보시던지요~ 이 기회에 의원한테 얼굴 도장 확실히 찍어두면 편하잖아? 그리고 얼마나 좋은 일하는건데.
영범 씨도 알잖아. 달구 의원 저 곰보 얼굴 때문에 육십 평생 결혼도 못 해보고 여자라곤 손도 못 잡아본거.
육십까지 돈 모으는 재미로 살았다면 이제 집에서 돼지라도 한 마리 치면서 소일거리 하면 덜 쓸쓸할 거 아니야. "

" 무슨 또 얼굴 얘기람. 그 얘긴 그만 두자. 돼지는 암컷으로 하나 알아보지 뭐. 허가제 때문에 골치 아픈 점도 많이 생겼지만
이 기회에 아예 사업 접는 인간들도 많으니까 구하려면 있기야 있겠지. "

" 히히히. 아깐 쉽게 구해지냐더니, 이젠 또 구하려면 구할 수 있다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거봐. 무슨 남자가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래?
아무튼 달구 의원 저정도면 양반이야. 노골적으로 돈 달라는 의원들 그동안 얼마나 많았어? 선거에 돈 다 날려먹고 엉뚱한데서 뽑고 말야. "

" ... "

그랬다. 술접대도 아니고, 골프접대도 아니고, 상자 밑에 신사임당을 깔아서 보내달란 것도 아니고,
자기 돈으로 살만한 좋은 돼지를 가진 농가를 알아봐달라는 부탁.
생각해보면 그리 난처한 부탁은 아니다. 다른 진상들에 비하면.
영범은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폐업 예정 농가 목록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부탁 받은 일이라면 최대한 빨리 처리해주는게 영범의 신조였다.

- 살이 잘 오른 놈이면 좋겠는데, 살집이 좀 두툼하게 오른 녀석으로..

- 무조건 암컷..

' 대체 무슨 생각이야. 인공수정을 한다고 쳐도 암퇘지 한 마리로 무슨 돼지를 키운다고.. 이미 가진 돈도 많은 사람이. '

영범은 나름대로 추리를 해보려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구해달라는 돼지나 빨리 연결해주고 더는 상관하지 말자며.


2.

돼지를 팔고 싶다는 농가와 연락이 닿은 영범이 달구 의원과 연결시켜준 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달구 의원은 어느새 집 옆에 축사까지 최신식으로 말끔히 지어놓곤 허가 민원을 처리하기 위해 축산자원과를 다시 찾아왔다.
커피 한 잔이 채 식기도 전에 허가신청서 작성을 마친 달구 의원은 허가제 담당자와 악수한 뒤,
직접 사온 에너지드링크 한 박스를 영범의 자리 밑에 놔두면서 영범에게도 악수를 청했다.

" 김 주사 덕분에 좋은 돼지를 구해서 참 좋아요. "

" 의원님 추진력이 대단하십니다. 언제 돈사는 또 그렇게 지으셨습니까. "

" 김 주사가 허가제 받아야 한다고 혼쭐을 내는 바람에 부랴부랴 지었지. 하하하. "

" 아유, 짖궂으십니다. "

" 농담. 아무튼 내가 축산자원과 속 썩일 일은 없을 거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백신이고 소독약이고 다 내 돈으로 살거니까,
군민 세금에 손 안 벌릴테니까. "

" 필요하시면 받아가셔도 됩니다. 그래야 저희도 협조를 받죠. "

" 하하하. 필요하면 말이지요? 알았어요. 그럼 수고해요. 좋은 날에 또 만납시다. "

" 들어가십시오. "

들뜬 발걸음으로 축산자원과를 나서는 달구 의원의 뒷모습.
그러나 그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군청 복도 사이에선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모 의원이 돼지 돈사를 지은 뒤론 그 안에 틀어박혀 통 사회 생활도 하지 않는다더라,
지역구 관리는 커녕 얼굴 보는 사람이 드물다더라ㅡ..

현역 군 의원이 돼지 한 마리 때문에 돈사에 틀어박혀 은둔 생활이라니?
그러나 의회가 열릴 때면 무조건 자리엔 착석해 있는데다 일도 곧잘 해내는 달구 의원이므로
군청 사람들도 해당 소문을 그리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다.

오히려 축산자원과 담당 예산이나 조례에 대해 따지고 드는 의원이 있으면 달구 의원이 변호를 자처하며 막아줬고,
영범은 그 덕에 과장 앞에서 어깨를 피고 다닐 수 있었기에 달구 의원에게 고마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달구 의원은 든든한 축산자원과의 방패가 되어줄 것만 같았다.


3.

" 조심해서 가슈! "

" 예예, 사장님. 국가 보조금으로 설치한 거니까 맘대로 팔거나 누구 주고 그러면 안 됩니다, 아셨죠? "

" 허! 걱정도 팔자요. 내가 여기서 돼지 키운 게 몇 년인데 어디 가서 사기 칠까봐? "

" 노파심에 말씀 드려봤어요. 갑니다~ "

" 예! 수고하쇼! "

사료 탱크 지원사업 완료 확인을 위해 현장 점검을 마친 영범과 수아를 태운 차가 돼지 농장을 떠나고 있었다.

" 영범 씨. 달구 의원 그 뒤로 진짜 연락이 없네? 이 근처지 아마? "

" 아. 맞다. 한달구 의원. 나온 김에 좀 들렀다 가자. 입구에 소독조 설치해놨는지 봐야지. 그리고 허가 내줄 때부터
지금까지 달구 의원 돈사 구경을 안 해봤으니까 한 번 구경이나 해보구. "

" 그래. 나도 특별히 바쁜 건 없어. 오후에 처리하면 되니까 달구 의원 집에 가보자. 전화 할까? "

" 내가 걸게. "

영범이 달구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의원은 받지 않았다.

" 안 받는데.. 그냥 열려있으면 구경이나 슥 하고 오지 뭐. "

" 흐음. 의회 갔거나 지역 행사 갔겠지. 소문처럼 돈사에 박혀있을리가 없잖아. "

" 그런건가. 하긴. "

차로 5분 남짓 달리자 어느새 달구 의원의 집 앞에 도착해있었다.
전에 없던 흰 가설 건축물이 그가 새로 지었다는 돈사인 것 같았다.
돼지 한 마리만 덜렁 들어가있는 것치곤 과분하리만큼 넓었는데,
환기창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 개방을 시킬 수 있는 구조임에도 그러지 않은 채 아주 단단히 닫혀 있었다.

" 한 마리라서 뭐 냄새 때문에 항의 들어올 일도 없겠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구만. 내 집보다 넓네. "

" 영범 씨가 대신 살아 그럼~ "

" 참나. 진짜 우리 집보다 좋아보여서 웃을 수도 없습니다요. "

" 아하하! 기분 나빠? 사과할까? "

" 완전 날 가지고 노는데 재미가 들렸다니까. 그나저나 이 소독조 좀 봐. "

" 왜? 소독약도 잘 채워져있고 규정대로 해놨는데? "

" 이 주변에 소독약 밟고 내놓은 발자국들도 좀 보란 말이지. "

" 아... 안 말랐네. "

" 분명 돈사 안에 있을거야. 전화는 왜 안 받는거지? "

영범이 다가가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다만 귀를 가까이 대어보았을 때 문틈 너머에서 기분 나쁜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꾸에엑ㅡ, 뀌익ㅡ.

" 돼지가 울어. "

" 그럼 울지, 웃냐? "

" 쉿. 조용히 해봐. "

" 셜록이세요? 영화 찍냐 지금? "

영범이 더욱 소리에 집중하여보니 소리는 두 개가 겹쳐져 있었다.
목이 째져라 울어대는 돼지의 비명소리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남자 목소리.

... 헉, ... 헉, ... 내거... , 기분... , 후우-.

좋아.. 헉.. 최.. 고..

꾸엑ㅡ, 꾸에엑!

" 이게 뭐지, 이해가 안 돼. "

" 아. 탐정놀이 그만하고 갑시다. 김영범 주무관님. 그러다 주민들이 보면 어쩌려고 그래. "

" 이 인간, 돼지한테 말을 걸어. "

" 네로도 파트라슈한테 별의 별 이야기 다 했으니까 신경 끄고 가자아~ 좀!
나도 수의사지만 동물들한테 말 걸고 그러는데 뭐. 게다가 돼지는 말귀도 알아먹을만큼 똑똑하고. "

" 도무지 모르겠네. 수아 씨, 일단 돌아가자. "

" 일단 가자고? 또 올거야? 언제는 신경 안 쓴다더니- 변덕쟁이. "

" 촉이 안 좋아서 그래. "

" 예예. 이참에 이름도 코난으로 바꾸시죠. "

꺼림칙한 기분이 남아있었지만 오후 일정을 처리하기 위해선 지금 복귀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사람을 태운 차는 잠시 뒤 달구 의원의 집 앞을 떠났다.
여전히 하얀 돈사는 굳게 닫혀 있었다.


5.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최악의 소식이 두 사람을 반겼다.
이미 과 내부 분위기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 팀장님, 구제역이라구요? "

" 그래. "

" 어딥니까? "

" 경북 고령. 아직 정밀검사 결과는 안 나왔고. 간이 키트 검사 결과는 양성.
근데 거의 확실하니까 농림부에선 전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더라.
게다가 발생 농가말야, 우리 쪽 농가에 돼지 졸라 많이 보내는 살맛나눔농장이야.
역학 분석이고 뭐고 할 필요도 없어. 직격탄 맞은거야. 전두수 살처분할 거 같다. "

" 보상은요? "

" 100% 전부 보상해주는 한이 있더라도 살처분 하랜다. 장관이 직접 명령한거야. "

" 아ㅡ, 몇 마리인데 그걸 다 살처분한답니까. "

" 까라면 까야지, 별 수 있냐. 집에 미리 전화 해놔라. 앞으로 퇴근이고 뭐고 없다고. "

" 아- 진짜.. "

" 영범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마라. 돼지 다 묻고, 보상금 다 주면 되는거야. 농림부에서도 필요한 대로
지원해줄거야. 구제역 조기종식 시키려면 이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수아 씨. "

" 네. 팀장님. "

" 역학 걸려있는 농가들 주위로 방역대 설정하고 살처분 추진계획 수립해서 결재 올려.
한 가지 팁 주는건데, 방역대 거리 상관없이 어차피 다 살처분이야. 관련 근거는 쪽지로 보내놨으니까
명시해놓고. "

" 알았어요. "


그 말, 그 순간을 이후로 눈 코 뜰새없이 바쁜 나날이 펼쳐졌다.
축산자원과 전원은 사무실을 집처럼, 집을 사무실처럼 쓰며 구제역 종식을 위해 매진했다.
그건 흡사 총을 들지 않은 전쟁이었다.

죽음의 구덩이를 파놓고,
돼지를 데려와 전살기로 지진 다음 포크레인으로 밀어넣는데,
전살기로 죽지 않은 돼지는 살기 위해 도망가다 도부들에게 망치로 맞아 그 자리에서 죽었고,
동원된 수의사들은 안락사 물약을 주사해 한시라도 빨리 돼지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규정대로 처리하기엔 인력도 모자라고 물자도 모자랐다,
1이란 노력으로 죽어줘야 할 돼지가 2,3을 들여도 죽지 않는다면
죽은 셈치고 구덩이로 밀어넣어야 했다.
그런다고 죽은 척해줄리 없는 돼지들이 구덩이 밑에서 울부짖었고,
포크레인에 의해 상처입고 떨어진 돼지, 망치에 머리가 깨진 돼지,
떨어지는 돼지 밑에 깔려 죽어가는 돼지,
그 돼지, 돼지, 돼지!
돼지들은 피에 젖고, 겁에 질려 울부짖으며, 끝내는 상당수가 살아있는데도 흙에 덮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런 구덩이가 의안군 내에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동원된 공무원, 수의사, 인부 모두 제정신으론 버티기 힘든 살처분 지옥이 모두를 광기의 섬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하루종일 피비린내와 돼지 비명소리에 시야는 붉어지고 귀는 먹먹해진 사람들이 사무실에 돌아오면
잔뜩 독기가 오른 농민들이 돼지 분뇨를 사무실에 뿌려대고, 혹자는 몸에 휘발유를 뿌린 채 들어와 라이터를 들고
같이 죽자며 소동을 펼쳤다.

한때는 사장님, 주사님, 하며 서로를 배려하던 사람들이라고 믿기 힘들만큼 서로를 처절하게 긁어내렸다.
죽은 돼지가 부러운 건지, 산 사람이 불쌍한 건지 알 수 없는 나날의 연속ㅡ.

그러나 시간이 결국엔 해결해주리라, 살처분 전쟁에도 끝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6.

" 한달구 의원 온다고 온다고 해놓고 아직까지 안 데려왔어, 뿅뿅. 진짜. 뿅뿅같이 하네. 한 마리 가지고. "

" 영범 씨, 진정해. 말 그대로 한 마리잖아. 별 문제 아니야. 데려오면 되는거잖아. 참아. 응? "

" 수아 씨, 나 조금만 시간 줘. 가서 문을 부숴버리든지 해서 끌고 올테니까. "

" 안 돼, 구제역 현장에 있던 사람이 무슨 농가를 들어가. "

" 왜 못 들어가, 지금 의안군 사람치고 돼지 옆에 안 간 사람이 어딨어? 다녀올게. 수아 씨는 모르는 일인거야.
팀장님께 깨져도 내가 깨질거니까 이 일에 신경 꺼. "

" 아! 김영범! 진짜 이럴래? 시동 꺼! "

창문을 두드리는 수아의 만류를 무시한 채 영범의 차는 달구 의원의 집을 향해 달려나갔다.

' 십일이 되가는데 돼지 한 마리 못 데려온다고? 무슨 속셈인거야? 자기 돼지만 소중한 줄 알아? '

영범은 달구 의원이 사는 마을의 이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이장님. 저 축산자원과 김영범입니다. 달구 의원 집에 있습니까? 돼지 안 데려옵니까?

- 아이고, 심장아. 목소리 좀 낮추게. 일제시대 순사 마냥 사람 잡겠어. 그리고 달구 집에 없다네.

" 돈사에 없다구요? "

- 그래. 진작에 돼지 끌고 뒷산으로 갔어.

" 산으로 갔다구요? 왜요? "

- 그 산에 자기 앞으로 된 필지가 있는 모양이지, 거기에 알아서 살처분하고 끝낸다고 데려갔어.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살처분을 멋대로 하는 게 어딨어요! "

- 아이고! 글쎄 소리 좀 지르지 말라니까!

" 뒷산, 뒷산..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쇼! "

뒷말은 듣지도 않은 채 전화를 끊은 뒤 영범의 차는 좀 더 속력을 높였다.
뒷산까지는 그 속도로 20분 가량을 더 달려가야 했다.


7.

" 한달구 의원님! 한달구 의원님! 어디 계십니까? "

목이 터져라 의원의 이름을 부르며 산을 헤집고 다니는 영범.
한달구 의원 앞으로 되어있다는 필지 정보를 사무실에 있는 수아로부터 제공 받은 덕분에
점점 수색망을 좁혀갈 수 있었지만 이미 시간은 꽤나 지체되어 있었다.

" 아. 저 트럭! "

마침내 의원의 돼지 운반차량을 발견한 영범이 운반차량으로부터 찍혀있는 돼지 분변 자국을 따라 추격을 시작했다.
잠시 뒤 영범은 돼지 한 마리를 발견했지만 그와 한 덩어리가 되어있는 남자도 함께 발견했다.
암퇘지의 엉덩이를 부여잡고 땀에 젖은 채 허리를 움직이는 나체의 한달구.

" 하악, 하아, 이렇게 못 보내, 널 이렇게 못 보내. "

" 지금 대체 뭐하시는 겁니까, 뿅뿅! 우욱!.. "

토악질을 가까스로 참는 영범과 그런 그를 당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달구.
달구는 얼어붙은 채 어쩔줄 모르나 싶더니 마찰로 새빨갛게 달아오른 자신의 물건을 암퇘지의 음부에서
빼내어 바짓춤에 슥슥 닦았다.

" 김영범 주사.. 모르는 척 해줘요. 그냥 가줘. 나쁜 꿈이라고 생각하고! "

" 안 됩니다. 지금 살처분 안 한 농가가 어디 있습니까? 이 돼지도 살처분 해야 합니다. "

" 내가 하겠네! 내 손으로 해서 반드시 처리할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줘, 구제역 백신도 맞게 한 돼지야.
항체 형성도 잘 되어있다는 걸 알잖나! "

" 안 됩니다, 방심하는 순간 구제역은 틈을 비집고 다시 발생합니다. "

" 내 이 수치스러운 꼴을 언제까지 똑바로 볼텐가? 내 자괴감도 생각해줘. "

" 의원님의 페티쉬가 어떻든 간에 제 알 바 아닙니다. 그거랑 상관없이 돼지는 살처분해야 합니다. "

" 단순히 내가 돼지랑 섹♡! 그 놈의 섹♡ 때문에 이 돼지 못 보낸다는 줄 알아? "

" 정신 차리십쇼! 돼지랑 섹♡하는 거 자체도 사실 정신병자 같지만 지금 전 군민을 생각해서
할 일을 하는 것 뿐입니다! "

" 네가 뭘 알아! 잘 봐, 이 돼지 지금 젖이 부풀어있어, 유두에 몽우리가 잡히지.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

" 똑똑히 쳐다보라고! 이 돼지! 임신했어! 임신했다고! "

" 왜 이렇게 답답하게 나오십니까, 모돈 가격에 뱃속에 들어있는 자돈들도 함께 쳐서 보상해드릴테니까 갑시다! "

" 닥치지 못 해! 그런 보상 필요없어, 이 돼지는 지금 나의 아이를 임신했단 말야! "

" 미친 소리 하지 마십쇼! "

" 뭐가 미쳐, 나 제정신이야, 지금껏 내가 바라고 바라던 내 아이가 생긴단 말이다! 조금만 견디면! "

" 진짜 미쳐버렸군요. 돼지랑 뒹구는 것까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겠지만.. "

" 그 파리로 가득한 돈사 안, 똥밭 위에서 질척거린 끝에 이 돼지와 나 사이에 결실이 생긴거야!
보통 사람의 보통 얼굴로 태어나 보통 사랑을 해본 너는 평생 가도 이 처절한 기쁨 따위 모르는 게 당연하지! "

" 제발 정신 좀 차려요! 다들 미쳤지만 지금 의원님이 제일 미친 것 같단 말입니다! "

" 닥쳐, 넌 아무 것도 몰라,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데, 몇 번을 사정한 끝에 이 돼지가 임신했는지 아냐! 저리 꺼져! "

제법 길고 뾰족한 나뭇가지를 집어든 달구가 영범에게 달려들었지만 영범은 자세를 틀어 피해버렸고,
달구는 그대로 중심을 잃은 채 비탈을 타고 굴러떨어지다 바위에 머리를 부딪혔다.

" 하아.. 하아.. "

그대로 기절해버린 달구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영범은 암퇘지를 달래어가며 트럭에 올라가도록 유도했다.
발판을 밟고 트럭으로 올라가는 암퇘지의 가랑이가 온통 피투성이였다.
영범은 차에 꽂혀있던 키로 곧장 시동을 건 다음 살처분 현장을 향해 트럭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8.

군데군데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있었고 그 위는 석회와 흙으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이제 열려있는 구덩이는 마지막 하나, 공무원과 수의사, 인부들 모두 넋이 거의 달아난 채 기계처럼
돼지를 밀어넣고 있었다. 눈이 빛나는 건 오로지 영범 한 사람 뿐이었다.

영범은 트럭을 세운 다음 도부들을 불러 암퇘지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반항한다면 망치로 두개골을 부숴 죽일 생각이었지만 암퇘지는 자신의 운명을 알기라도 하는 듯
구덩이 앞으로 스스로 걸어갔다.

암퇘지는 구덩이 앞까지 도착하자 잠시 고개를 돌려 영범의 눈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발을 헛디디며 구덩이 속으로 굴러내려갔다.

영범은 암퇘지의 배가 몹시 불러있다는 사실을 그동안에 간파해냈지만 최대한 머리에서 그 모습을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달구의 광기에 찬 목소리가 귓청을 여전히 때려대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꺼낸 영범은 애인에게 전화 한 통을 걸었다.

" 자기? 나야.. 출장 나와있지. 응. 살처분. 자기, 있잖아. 나 만약에 그만 두고.. 모은 돈으로
같이 하와이나 괌 이런데 가서 좀 쉬다오자고 하면.. 어떡할거야? 그래도 될까?.. 무슨 일 있냐고? 으음, 아니야.
그냥.. 그냥 조금 지쳐서.. "


9.

의안신문 O월 OO일
" 구제역 O월 OO일자로 종식 선언, 백신 접종 철저와 조기 대응으로 거둔 승전보 "
" 의안군 의회 한달구 의원, 관내 저수지에서 변사체로 발견 - 스스로 목숨 거둔 것으로 보여 "


10.

시간이 구제역의 악몽을 끝내 밀어넣었듯, 그로 인한 아픔도 시간이 감에 따라 점차 치유되고 있었다.
영범은 공무원을 그만 둔 뒤 여자친구와 함께 어학연수를 떠났지만 수아는 그대로 남아 뒷수습을 전담했고,
그 공로로 6급 팀장으로 승진하여 의안군 축산자원과의 든든한 날개 노릇을 하고 있었다.

" 배주석ㅡ, 빨리 안 타? 팀장을 운전수로 부리면서 차까지 늦게 타고 말야. "

" 죗, 죄송합니다. 팀장님. "

" 가자. 오늘은 매몰지 사후관리하러 가는거야. 현장 처음 가보지? 뉴스로만 봤을테니까. "

" 예. 실제로 가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

" 이 기회에 가보는거지. 그 매몰지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가 있어. "

" 뭡니까? "

" 한달구라고.. 옛날에 군 의원 한 명 있었거든. 옛날도 아니지. 몇 년 안 지났으니까. "

" 예에.. "

매몰지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신입 공무원 주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수아가 직접 모는 차는 어느덧 매몰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그때 영범 씨가 본 돼지 배가 진짜로 불러있었다는거야ㅡ. "

" 으으으.. "

" 푸하핫! 짜식, 되게 겁먹네! 야! 사자랑 호랑이도 어려운 걸, 사람이랑 돼지가 되겠냐!
뭘 심각하게 듣고 있는거야. 자, 다왔으니까 내려. 여기야. 구덩이 보이지? 팻말 읽어봐. "

" 아. 예.. 관계자 외 접근 금지.. 상기 지역은 구제역으로 인한 살처분 사체를.. "

" 마음 속으로 읽으면 되잖아, 따라와봐. 자, 여기 이 파이프가 뭘 거 같아?
사체를 땅 속에 묻었으니까 시간이 갈수록 부패하면서 가스가 발생하겠지?
그 가스가 나갈 곳을 못 찾으면 엄청난 압력을 받아서 터져나와버린단 말야,
실제로 분출되서 핏물이 나오는 곳도 있어. 그런 상황을 막고자 이렇게 파이프를 설치해서
가스가 빠져나오도록 한거야. 지금 나는 냄새는 바로 그 가스 냄새인거고. "

" 으으. 팀장님. 속이 안 좋습니다. "

" 몇 년 전에 죽은 사체가 아직 썩어가고 있는거니까 별로 향기로운 냄새는 아니지.
근데 누가 저번에 그러던데.. 이 파이프 사이로 돼지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

" 예에!? "

" 푸하하. 그냥 너 겁 먹는 모습 보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네.
그땐 그냥 넘겼는데. 어? 아이 썅, 저거 뭐야.. "

" 어디 가십니까? "

황급히 수아가 어디론가 달려가자 주석이 어리둥절해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다른 구덩이의 앞이었는데, 꽤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고 약간의 내용물이 그 입구로
삐져나와 있었다.

" 누가 이런거야. 아ㅡ씨, 진짜 짜증나네. 가스 때문에 삐져나왔나? 아닌데.. 그런 하자는 여태껏 없었는데. "

" 팀장님, 못 참겠어요. 우웨엑. 크웩. "

" 야, 장난하냐? 빨리 와. 코 막고 오면 될 거 아냐. "

" 사람 소리도 들리고 무섭습니다. "

" 사람? 너랑 나 말고 이 주위에 지금 사람이 어딨어. 이젠 네가 장난치는 차례인가? "

꾸우욱. 꾸우윽.

...?

분명히 구멍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 보십쇼. "

" 진짜잖아. 역시 사람이 뚫은 구멍인가? 저기요! 계세요!? 계시면 나오세요! 거기 들어가면 안 됩니다! 질식한다구요! "

수아가 무릎을 꿇고 용기있게 구멍 속으로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주석은 수아가 순식간에 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걸 봤다.

" 티.. 팀장님! 으아아! "

잠시 뒤 튀어나온 손은 수아의 것은 아니었다.
마치 돼지의 발처럼 갈라진 채 발굽을 가지고 있었으나 사람의 손처럼 다섯 갈래로 갈라져 제각각 움직였으며,
그 손으로 땅을 집은 뒤 천천히 빠져나오는 '그 무엇'은 인간보다는 족히 다섯 배는 커다란 얼굴을 가지고 있었으며
입에는 수아의 머릿가죽을 비롯해 분홍색, 초록색, 빨간색, 형형색색의 부패한 돼지 부산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꾸우우, 끄으욱!


"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

겁에 질린 채 바닥에 엎드린 주석은 '그 무엇'이 근처에 다가온 걸 느끼는 와중에도
대학교 시절 돼지에 관해 공부했던 한 구절을 되뇌이며 현실을 애써 부정했다.

[ 돼지의 임신 기간은 114일이며, 배란 주기는 24일]
[임신 징후는 음부가 붓고, 소리를 지르며 먹이를 잘 먹지 않는다.]
[평균 출산 숫자는 품종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6-9 마리다.]


꾸웨에엑ㅡ !!


" 아악-!! "


'평균 출산 숫자는 품종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6-9 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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