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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미스테리
[괴담] 선인장
  • 리자
  • 2016.10.24 10:36:04
  • 조회 수: 173

 

 

 

 

초등 6년, 중등 3년, 고등 3년을 합친 세월을 의무적으로 학교에서 보내며 자라는 보통 학생들이라면,

그 동안 단 한 명도 급우 중에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던져본다면 어떨까, '단 한 명이라도 괴롭힘을 당하는 급우를 본 적이 있다.'

십중팔구? 아니, 백이면 백이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만약 여중생 시절의 나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면?

물론 '예'하고 대답했을 거야.

지금의 나에게 물어봤을 때보다 더 빨리 대답했을 테지.

 

ㅡ 

 

" 야, 선인장! 가시 세워봐! "

 

" 호홋, 세희야앙~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냐앙? "

 

" 뭐 어때, 이래야 빨리 세울 거 아냐. 야 쉬는 시간 끝나가잖아, 좀 세워봐! "

 

옆 반 애들이 찾아와선 짓궂게 우리 반의 '선인장'을 놀려댔다.

교복 명찰에 '황미영'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붙어있는데도 그녀들은 미영이를 '선인장'이라 불렀다.

3분단 중간 자리에 앉은 미영이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1분단 맨 뒷자리의 나는 그 장면을 

슬금슬금 쳐다보면서도 손으론 공책 검사를 앞두고 사회 필기노트를 바삐 옮겨적는 중이었다. 

쉬는 시간 내내 투자해야 다음 시간에 회초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근히 재밌는 구경을 놓칠 순 없었다.

 

" 선인장이라고 부르지 마. 사람 그렇게 놀리면 좋아? "

 

" 아… 존나 말 안 통하네. 가시 한 번 세워보라고! 그것만 보여주면 간다니까? "

 

" 그걸 니들이 왜 봐야 하는데? "

 

" 아, 가시곰보년 뇌까지 가시 찔렸냐? 관심 좀 가져주니까 니가 대단한 년이라도 된 줄 아나 봐?

한두 번 봐주면 알아들어야지, 존나 띠겁게 말하네, 좆도 아닌 년이. "

 

세 명 중 두 명은 단순히 일진 가방이나 들어주고 돈이나 갖다 바치는 끄나풀이었지만,

가운데에서 본격적으로 욕을 하며 미영이를 괴롭히는 년은 옆 반에선 가장 질이 나쁘면서

전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송세희였다.

 

" 야, 야, 대가리 쳐들어. 이빨 빠개버리기 전에. 미쳤냐? 어? 쳐다봐, 쳐다보라고.

아까처럼 또 대들어봐, 너 뭐라 그랬냐? 부르지 마? 존나 명령조로 얘기하네?

내가 니 따까리냐? 뭐? 놀리면 좋냐? 아, 졸라 어이없어. 맞먹어라? 응? "

 

송세희는 손으로 미영이의 턱을 잡고 고개를 이리저리 마구 흔들어댔다.

미영이는 괴로운 표정으로 이리저리 몸부림쳤지만 세희 옆의 두 년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팔 한쪽씩을 붙들고 있어서 세희의 손찌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 존나 희한하게 생긴 년 하나 있다길래 구경 왔더니 어이 털리고 가네.

아… 씨발년, 조만간에 또 보자? "

 

세희는 미영이의 뺨을 몇 번 후려친 뒤 머리카락을 쥐어흔들고는 씩씩거리며 반으로 돌아갔다.

그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미영이의 책상 위에 있던 교과서와 필통이 떨어져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수업 시작종이 울렸지만 아직 선생님은 들어오시지 않았다. 나는 다행히 노트를 모두 옮겨적었고,

3분단 아이 몇몇이 미영이 대신 미영이의 물건들을 주워 책상에 올려주었다.

미영이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곤 최대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자세를 고쳐잡았다.

 

" 쌤 오신다! "

 

4분단 앞자리에서 늘 선생님의 입장을 알려주는 애가 소리침과 동시에 사회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반장의 인사와 함께 수업이 시작되었다.

 

" 다들 노트는 잘해놨네. 다른 반 애들 매 맞은 소문이 돌았나 보다? 글씨 엉망인 애들은 딱 몰아서

한 티가 나는데, 다 잘 해와서 선생님이 그것까지 뭐라고 하진 않을게. 몰아서 하지 마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안 시키지… 공부하라고 필기하라는 거지, 필기를 했냐 안 했냐가 중요한 건 아니야…. "

 

휴우, 다행이다, 이제는 미리미리 필기해야지, 

안도하며 언뜻 3분단 쪽을 쳐다보자 미영이가 고개를 숙인 채 분을 삭이고 있었다.

 

' … '

 

생전 처음 보는 옆 반 애가 찾아와선 외모를 가지고 놀리다가, 별안간 뺨따귀에 머리채까지 잡아 흔들고,

쌍욕까지 들었으니 아무리 진정하려고 해도 화가 나겠지… 미영이가 측은했다.

그렇게 협박하고 때려도 보여주지 않던 미영이의 신체적 특징이 점점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 변화를 반 아이들 거의 다가 알아챈 듯 힐끔힐끔 사회 선생님이 칠판 보는 틈을 타서

미영이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쭈륵, 쭈륵!

평소엔 비늘처럼 누워있던 미영이 얼굴의 가느다란 촉수들이 딱딱해지며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조용한 수업시간이면 '쭈르륵,쭈륵' 거리며 얼굴 피부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소리가

정확히 들렸다. 

 

" 흡… 스흡… "

 

미영이의 숨이 거칠어졌다. 감정이 격앙되어 그런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화를 참기 어려운 듯, 완전히 얼굴이 붉어져선 거센 콧바람을 들이쉬며 가시를 완전히 세웠다.

그랬다, '선인장'이란 별명은 그래서 생겼다.

화를 내면 얼굴에 돋아나는 가시 때문에.

우리 몸에는 혓바닥의 유두나, 소장의 융털과 같이 촉수를 연상시키는 조직이 일부 존재하지만

미영이처럼 얼굴에 직접 촉수가 솟아오른 경우는 의학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더군다나 평소엔 쳐져 있던 촉수가 화가 나면 점점 딱딱해지며 바로 솟아 가시처럼 일어서는 현상은

더욱 희귀한 일이었기에 오늘 같은 사건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곤 했다.

안 그래도 얼굴에 가느다란 촉수들이 드문드문 덮여있는 것이 굉장히 징그러웠는데,

그게 빳빳하게 일어선 채로 씩씩거리는 미영이를 보노라면 정말 선인장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 선생님은 그런 미영이를 눈치채셨을까, 어느 쪽이든 선생님은 미영이를 부르지 않았다.

미영이 편만 들어줄 수도 없고, 이런 일이 한 번 두 번이 아니다 보니 다만 미영이를 더 자극하지 않기로

하신 것일까? 마지막 교시였던 사회 시간은 그렇게 끝났다.

담임 선생님이 종례하기 위해 오실 때까지 아이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하루를 마칠 준비를 하며

재잘재잘 떠들었지만 미영이는 혼자 팔에 얼굴을 파묻곤 한참을 엎드려 있었다.

회초리가 교실 앞문을 탁탁, 두 번 치자 순간 교실이 조용해지며 모두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 자는 애 뭐야. 미영이. 일어나. "

 

" 네. "

 

엎드려 있던 미영이가 얼굴을 일으켰다. 눈시울이 붉은 채였지만 가시는 가라앉은 상태였다.

 

" 미영이 너 울었니? "

 

" 아뇨, 자다가 일어나서… "

 

" 저런. 너무 늦게 자면 안 돼. 반장, 인사하자. "

 

반장이 '차렷'하고 인사를 시작했다.

종례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 수고하셨습니다- "

 

그 마법 같은 주문 뒤론 갑자기 '와아' 시끌벅적하게 굴어도 선생님은 개의치 않고 퇴장한다.

다른 반 아이들도 언제 들어왔는지 우리 반 사이 사이에 섞여 있다.

떡볶이 먹으러 가자는 몇몇 친구의 권유에 가방을 서둘러 싸던 중 옆 반에서 온 아이들이 

우리 반 아이들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 선인장 쟤 울었다며? "

 

" 세희가 가시 세워보라고 그랬는데 뻐기다가 좀 맞았거든. "

 

" 진짜? 존나 불쌍하다… " / " 야, 그냥 한 번 세워주면 되는 거 아냐? "

 

" 뭐래, 그거 자기 맘대로 안 돼. 화가 나야 가시처럼 변한다는데? "

 

" 그럼 세희가 제대로 한 거 맞네. 근데 왜 안 일어섰지? "

 

" 그땐 화 안 냈어. 수업 시간에 점점 화내더라. 분했겠지. "

 

… 신경 쓰지 말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그렇게 가방을 짊어지고 내 단짝들과 교실을 나서려는 순간 뒷문이 거세게 열렸다.

'쾅' 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다.

 

" 귀 떨어질 뻔했잖아, 살살 들어와. 송세 쌍년아. "

 

" 너 있었어? 쏘리~ "

 

우리 반에선 거의 유일한 일진이지만 패거리가 반에 없어 굳이 반 분위기를 망치지는 않는 문지현.

같은 패거리가 소위 말하는 '빽'을 등에 업고 교내에서 가장 기세가 등등한 그룹인 데다 초등학교 때부터 

송세희와는 어울려왔던지라 서로 반가워하면서도 인사는 늘 그런 식이었다.

 

" 문젼~ 너 오토바이 타러 안 올래? 공고 오빠들이 술 담배 다 뚫어놓을 거거든. "

 

" 난 학원 다니는데. 송세 너나 가라. "

 

" 어휴, 범생이년. 주제에 공부는… 근데 선인장 어디 갔냐? 좆같아서 다시 조지러 왔는데. "

 

" 니 뒤에 있네. 병신아. "

 

" 어? 하이~ 선인장~ 잘 있었어? 이쁜 얼굴 안 다쳤어? 어디 볼까? "

 

송세희가 두 손으로 미영이의 얼굴을 감싸 쥐더니 갑자기 홱 손을 뗐다.

 

" 아, 썅! 얼굴에 울룩불룩한 거 뭐야, 기분 개더러워! "

 

" 얼굴 가지고 놀리냐, 애 기분 나쁘게… 야, 황미영. 너 빨리 가라. "

 

" … "

 

그러자 재빨리 가방을 집어 들고 미영이는 교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 어~! 문젼, 이러기 있냐? 같은 반이라고 지금 가드 치는 거야? 저년 좀 데리고 논다는데 서운하다? "

 

" 그냥 보내줘. 불쌍한 애 괴롭혀서 뭐해. "

 

" 야, 선인장 저거 문지현이 가란다고 진짜 가네? 문지현이 가드 쳐줬으니까 송세희는 껙 소리 

못 한다 이거지? 지금 그냥 간다고 끝일 거 같냐? 너 나한테 찍혔어 이 씨발년아- "

 

문지현에게 잡혀 더 미영이를 쫓아가진 않았지만 송세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교실 밖까지 울렸다.

괜히 같이 있다간 나까지 꼬투리를 잡힐 것 같아 교실을 나선 것이 다행이었다.

 

 

" 어머, 어떡해… "

 

다음 날 아침 자습시간에 아이들을 경악하게 한 건 등교한 미영이의 몰골이었다.

길던 단발머리가 남학생만큼이나 짧게 잘린 채로, 얼굴의 가시가 몽땅 일어선 채로 등교했다.

머리는 일부러 그렇게 자른 건 아닌 것 같았다. 서툰 바리깡질에 곳곳에 상처가 있고,

어디는 길고 어디는 까까머리가 돼 있는 것이 누군가 억지로 짧게 만들었단 티가 역력했다.

 

" … 너희 뭘 봐? "

 

그 말에 깡 있는 몇몇을 제외하고 나처럼 평범한 아이들은 언제 봤느냐는 듯이 자기 책상을 쳐다봤다.

그러나 우리 반에도 있기 마련인 껄렁껄렁한 아이들은 금세 미영이에게 질문 공세를 펼쳤다.

 

" 너 그거 세희가 그랬어? "

 

" … 상관 쓰지 마. "

 

" 오늘 그랬어? 지금 가시 일어섰는데… 와, 심하다… 얘 머리에 피딱지 봐… "

 

" 가까이 오지 마. "

 

" 얘들아, 이거 봐봐, 누구 연고 없냐? 얘 머리에 피 나! "

 

" 가까이 오지 말랬잖아, 썅년들아! "

 

복도까지 그 고함이 퍼지자 자습을 감독하는 선생님이 교실로 달려왔다. 

 

" 누구야! "

 

" …… "

 

우리 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선생님은 일어서있는 미영의 얼굴을 얼마간 쳐다보더니,

 

" 잠시 교무실로 좀 와라. " 하곤 미영이를 데리고 나가셨다.

 

그러자 미영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애들 몇몇끼리 잡담을 하기 시작했지만,

 

" 야. 너희 다 앉아. 깝치지 말고. "

 

문지현의 말 한마디에 기가 죽어 저마다 자리에 앉았기에 자습 시간은 그 뒤로 조용했다.

그리고 점심시간 종이 치도록 미영이는 자리에 돌아오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각 교실로 전파된 소문으론 송세희도 아침에 불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점심을 먹은 뒤 5교시 전, 12시 반이 돼서야 미영이는 자리로 돌아왔다.

가시는 서 있지도, 가라앉지도 않은 애매한 상태로 움찔움찔 거리고 있었다.

우리 반 날라리들은 아침에 문지현이 해놓은 말이 신경 쓰여서인지 미영이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다.

뜻밖에 미영이에게 말을 먼저 건 것은 문지현이었다.

 

" 상처 괜찮아? 송세희한테 그러지 말라고 해줄까? "

 

원래 반에서 조용히 자기 할 일만 하는 문지현이었지만 이렇게 신경을 써주는 건 어색할 정도였다.

따지고 보면 문지현도 전교에서 알아주는 일진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

그러자 더 의외인 상황이 펼쳐졌다.

 

" 착한 척 하지 마. 너희들 똑같은 거 다 알아. 그때 송세희 뒤에 나 있다고 가르쳐줘놓고

지금 와서 걱정해주는 척 하지 마. "

 

문지현이 내미는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뿌리친 미영이의 입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이 튀어나왔다.

 

" … 뭔가 생각을 잘못한 것 같은데. 황미영. "

 

문지현에게서 느껴지는 절제된 분노가 반 분위기를 급속도로 얼어붙였다.

 

" 너나 송세희나 다 똑같이 쓰레기잖아. 나 놀리는 쓰레기들 위에 있는 큰 쓰레기. 

신경 써주는 척 하지 마. 토 나올 것 같으니까. 내 머리 보여? 넌 상관없을 것 같아? "

 

" 나 우리 반에선 꼬장 부리기 싫으니까 참는다. 그만하자. "

 

'아, 다행이다… 역시 지현이야.' 하고 모두가 감탄할 정도로 문지현은 참을성이 있는 편이었다.

다른 일진들 같았으면 벌써 뺨이나 주먹이 나갔을 텐데도 문지현은 자기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애초에 과외며 학원까지 받는 부잣집 딸인지라 다른 일진들과는 차원이 다른 '격'이 있었다.

여기서 사태는 일단락되는가 싶었더니 가방을 부스럭거리던 미영이가 문지현의 뒤로 성큼 다가섰다.

무언가 발견한 아이들이 '어어!' 소리쳤지만 경고는 이미 늦었다.

 

싹둑, 싹둑 ! 

 

어떡해, 어떡해, 경악하는 소리가 반을 가득 채웠다. 그때까지도 사태파악을 못 한 문지현이 더듬더듬

자신의 손으로 뒤통수를 만지자 한 움큼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느꼈는지 그제야 뒤를 돌아봤다.

바닥에 기다란 머리카락이 널려있었다. 

 

" 너도 똑같이 당해봐. 아하하하. "

 

고소하단 듯이 미영이가 가위를 든 채로 웃고 있었다.

 

" 씨발, 너 뭐냐? 잘 해줬더니 호구로 보이냐? "

 

더 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문지현이 일어서서 미영이를 똑바로 마주 봤다.

옆자리의 아이들이 사태를 파악하곤 책상을 떠나 뒤로 물러섰다.

 

" 그래, 송세희나 너나 그게 니네 모습이지. 완전 악마. 악마. "

 

" 불쌍해서 가드 쳐줬더니 존나 뒤통수 맞네. "

 

문지현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서자 그때까지 당당하게 마주 보던 미영이가 뒷걸음질쳤다.

아무리 미영이가 반쯤 미쳤다고 한들 상대는 전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문지현이었다.

 

" 가위 들면 뭐, 어쩌려고. 찌르시게? 선인장같이 생긴 년 도와주다가 별꼴 다 보네. 아… "

 

미영이가 가위를 두 손으로 잡고 앞으로 힘껏 내밀었지만 그뿐.

싸움도 해본 사람이 하는 법이라 문지현이 득달같이 달려들자 그만 가위를 놓치곤

그대로 주도권을 빼앗겨버렸다.

 

" 씨발년, 씨발년! " 

 

순식간에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미영이에게 달려들었다.

비명이 이어지다 마지막엔 꺽, 꺽 숨 삼키는 소리만이 겨우 붙어있었다.

 

" 아… 씨발, 이 반 걸린 뒤로 사고 안 치려고 했는데. 야. 다 미안하다. 못 본 걸로 해라. "

 

그동안 문지현이 무서운 줄은 알아도 직접 실력 행사를 하는 건 본적이 없었지만

이번 일로 문지현이 괜히 전교권 일진이 아니라는 게 분명해졌다.

흡사 남자가 싸워도 저렇게 잘 때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으니까.

 

" 악마야, 너희는 악마야, 송세희 문지현 너희 다 악마야. "

 

자리로 돌아가려는 문지현 뒤로 바닥을 더듬거리며 가위를 찾는 미영이의 낌새를 눈치챘는지

문지현이 다시 달려가 미영이의 머리통을 걷어찼다.

쌍코피가 터져 나왔다. 피는 미영이의 것이었지만 비명은 다른 애들이 질렀다.

 

" 누가 좀 말려봐! 어떻게 되는 거 아냐 저러다가? "

 

그러자 인파 속을 뚫고 거들먹거리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짧게 줄여 입은 치마. 피어싱 흔적이 남아있는 귀. 송세희였다.

 

" 웬일이야? 문젼이 애도 때리고. 원래 찌질이들은 안 건들면서. 

딱 봐도 이 년이 존나 열 받게 했지? 내가 그래서 이 년 머리 저 꼴로 만들어놓은 거야.

잘 어울리지 않냐? 존나 나무 가지치기 한 것 같아 푸하하, 선인장도 다듬어야 이뻐지지~ "

 

문지현이 피투성이가 된 신발을 청소용 걸레로 대충 닦고 일어섰다.

피로 세수를 한 미영이의 얼굴 위로 가시가 쭈륵쭈륵 솟아있었다.

붉은 맨드라미꽃이 피어오른 것 같은 모습으로…

 

" 황미영~ 이름 불러주니까 어때? 니가 이긴 것 같냐? 선인장이라고 부르면 싫다며.

그래, 나는 선생들한테 꼰질렀으니까 한동안 잠잠할 것 같지? 그럼 조용히 학교나 쳐다니지,

왜 문젼은 건드렸냐? 정신 나간 년, 문젼 나보다 더 또라이야. 너 이제 어떡하냐? 그냥 자퇴해라.

나도 한 번 더 걸리면 퇴학이라는데, 우리 나란히 밖에서 볼까? "

 

지옥 중에 가시밭길을 맨몸으로 통과해야 하는 지옥이 있다던가,

그 지옥을 통과해온 사람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싶을 정도로 미영이의 얼굴은 참혹했다.

하지만 진정한 지옥은 먼 훗날의 얘기가 아니라 바로 그 순간부터 찾아왔다.

 

그 날 이후 미영이를 은근히 감싸주던 문지현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누가 미영이를 놀리건 말건 신경도 쓰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먼저 괴롭히기 일쑤였다.

늘 미영이 얼굴에 바르는 피부약도 바르지 못하게 했을뿐더러 약을 미리 바르고 오기라도 하면

물을 끼얹어 얼굴을 닦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이는 송세희의 아이디어가 더해져 곧 

'선인장에 물 주기'로 발전했는데, 그건 걸레 빤 물이 가득 들어있는 걸레 짜는 통에 미영이의

얼굴을 처박고 물고문을 시키는 것이었다.

아르르륵, 아르르륵, 구정물 속에서 거품이 터져나와 부글부글 올라오면 동시에 미영이의 

고통스러운 목소리도 함께 삐져나왔다.

그러면 송세희든 문지현이든 둘 중 한 명이 손에 쥔 미영이의 목아귀를 더욱 처박으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악마'가 깨어났다. 

처음엔 미영이가 그녀들을 악마로 몬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론 정말 악마가 깨어난 셈이 되었다.

 

나날이 '선인장 시리즈'는 늘어났다.

'선인장 햇빛 주기'는 과학 시간에 쓰고 남은 돋보기를 보고 착안한 아이디어였다.

검은 마분지에 대고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연기를 피우는 실험을 한 직후였는데, 미영이의 목을 졸라 

눕혀놓으면 다른 한 명이 돋보기로 빛을 미영이의 눈에 직접 쬐는 일종의 '실험'이었다.

그 실험이 얼마 가지 않아 미영이가 안경을 하나씩 챙겨오기 시작했다.

 

'선인장 관찰일기'는 송세희가 새 스마트폰을 사면서 시작된 선인장 놀이였다.

미영이가 화장실을 가면 그 위에서 미영이가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는데,

이를 알고 미영이가 의도적으로 화장실을 자제하자 설사약까지 몰래 타면서까지 미영이의 부끄러운 모습을

촬영하곤 했다. 이 동영상은 송세희의 '공고 오빠들'과의 단체 카톡방에도 매 회 올려졌다.

 

'선인장 비료 주기'…

이것만큼은 설명하고 싶지가 않다.

같은 학교 같은 학생으로서 같은 시간을 그곳에서 지냈지만,

나에겐 그저 학교생활이었던 시간이 미영이에겐 이런 일들로 가득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이름 자체에서 이미 유추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맞다. 인분, 자신들의 소변과 대변을 

강제로 먹였다. 이건 선인장 시리즈의 거의 마지막에 행해진 일이었다.

 

'선인장 수확하기'

그렇다면, 이건?

수확하기? 선인장 열매? 하지만 사람에게 열매가 날 리는 없다.

이것도 맞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군가를 괴롭히는데 소질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수확하기'란, 바로 미영이 얼굴의 가시를 빳빳이 세운 다음 그 가시를 억지로 잡아 뜯는,

비상식을 넘어서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였다.

 

 

" 따가워, 따가워, 이제 그만해, 내가 다 잘못했어, 다신 반항 안 할게, "

 

" 씹년아… 그래, 반항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고. "

 

" 너무 아파, 응? 죽을 것 같단 말이야… "

 

" 문젼, 뭘 뜸을 들여, 이렇게 그냥 확 뽑아! "

 

" 아아아악!! "

 

핀셋을 들고 어떻게 잡아뽑을까 궁리를 하는 문지현 옆에서 송세희가 손을 내밀어 가시(정확히는 촉수)를

그대로 잡아 뜯자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 야, 닦아. "

 

송세희의 말에 옆에 있던 따까리들이 두루마리 휴지를 풀어 들고 가시가 뜯긴 부위를 닦아댔다.

 

" 치워봐. 보게. "

 

피를 닦은 부위는 분홍색 살이 드러나 있고 금세 진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 으, 씨발~ 존나 징그러~ 어떡해~ "

 

" 송세, 너 그러다 상처 이거 감염되면 얘 어떻게 될지 몰라. 수확놀이 하는 건 좋은데

안 잡히게 해야지. "

 

" 또 샌님처럼 구냐? 언제 너처럼 자르고 약까지 바르냐? 그렇게 정성 들일 거면 왜 뜯냐 이걸?

존나 징그럽기만 하구만. "

 

" 글쎄… 처음엔 그냥 괘씸해서 했는데 이젠 별 생각 없네. "

 

… 고통에 울부짖는 미영의 입엔 어느새 걸레가 틀어박혀 있었다.

그 울음은 오직 우리 반 애들의 귀에만 아주 작게 들렸다.

너무도 서러운 울음이었다.

 

며칠을 두고 매일 '수확'이 계속되었는데도 미영이의 얼굴에 가시가 줄어들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없었다.

아마 본인도 어릴 때부터 외과적 수단을 동원해 가시를 제거하려는 노력은 해왔을 거라고 생각해보면

아마 가시는 재생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점이 더욱 문지현과 송세희의 '수확'에 재미와 근거를 가져다주었다.

괴롭히는 동시에, 재밌기도 하거니와, 그 대담하던 미영이 자신들에게 애걸복걸하며 사정하는 모습이

아마 어떤 정복감을 가져다준 것이 아닐까.

어쩌다 머리카락 하나가 뽑혀도, 혀를 한 번 잘못 씹어도 아픔에 몸부림치는 나로선

얼굴에서 매일 살이 뜯겨나가는 아픔이란 건 상상하기조차 싫은 악몽이었다.

그때 우리 반 사람들의 머릿속엔 아마 이런 의식이 깔렸지 않았을까.

'내가 아니라 다행이다.'

 

문지현은 미영이를 제외한 우리 반 아이들은 건들지 않았고, 이는 송세희도 마찬가지였다.

송세희가 애초에 이 반에 찾아오는 이유는 '선인장 놀이' 때문이었으니까. 적어도 우리 반 자체는

미영이에게만을 제외하곤 평화로웠다. '미영이에게만을 제외하곤'…

다른 아이들도 점차 문지현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문지현이 미영이에게 향하는 악의를 미리 막아주긴커녕,

미영이에게 어떤 일이 행해져도 신경도 쓰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중에는 '우리 반을 다른 일진들로부터 지켜주는 지현이에게 반항하는 못된 년은 맛을 봐야 

한다'는 일종의 합리화가 퍼져있었고, 직접 행위에 가담하지 않는 아이들에게도 그 말은 

방관자인 자신을 합리화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가고 있었다. 

미영이가 괴롭힘당하는 건 당연하다, 왜, 우리 반을 지켜주는 지현이에게 까불었으니까,

그럼 어떻게 한다? 미영이를 괴롭힌다, 그건 옳다, 왜, 우리 반을 지켜주는 지현이가 용납하니까.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방관자였으니까.

무서워서 맘 속으로 떨면서도, 

나는 괜찮은 척 수업 시간엔 수업을 열심히 듣고 쉴 땐 친구들과 웃고 떠들었다.

선인장이 햇빛을 받고, 물을 마시고, 비료를 먹고, 수확이 계속되도록 나는 가만히 있었다.

'저게 옳다고 생각하니? 저게 사람이 당해도 될만한 일들이야?' 라고 마음속의 누군가가 말해올 때면,

'저게 옳으니까 다들 가만히 있는 거야, 저게 당해도 될만한 일들이니까 다들 가만히 있는 거야.'라고 

마음속의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항변했다.

 

미영이의 마음속 가시가 돋아날수록 얼굴의 가시 또한 돋아났다.

문지현 때문에 얼굴에 피부약도 바르지 못했고, 매일 구정물로 세수하고 인분을 먹으니 독이 올랐고,

폭언과 폭행, 그리고 '수확'으로 인한 극도의 스트레스는 더욱 미영이를 최악의 상태로 몰아갔다.

그러나 우리 반 사람들에게 그건 절대 슬픈 일이 아니었다.

그냥, 우리가 키운 선인장이 아주 잘 자랐다.

그뿐…

 

 

시간이 흘러 미영이는 어느 날 전학을 가게 되었다.

모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한 발 앞으로 나섰지만 

흐리멍덩한 눈빛에선 총기를 볼 수 없었고, 반쯤 벌린 입에선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 박수~! " 

 

갑작스레 박수갈채를 이끌어 낸 건 전학 가는 정든 친구를 위한 급우들의 선물이었을까?

그럴 리가. '박수'를 외치며 모두를 손뼉 치게 한 사람은 능글맞게 웃고 있는 문지현이었다.

그 뻔뻔한 모습을 바라보던 미영이의 눈에 점차 총기 대신 독기가 맺혔다.

입은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윗니가 아랫입술을 파고들고 있었다.

쭈륵, 쭈륵, 가시가 일어선다… 

독기 맺힌 눈에선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 모습에 그제야 우리는 깨달았다.

우리가 무슨 짓을 그녀에게 해왔는지,

방관해온 자들,

선인장을 키워온 자들,

선인장을 키우는 자들을 키운 자들…

박수를 짝짝 치다 말고 박수 소리가 하나둘씩 끊겼다.

 

" … " 

 

그 지옥 같은 정적이란…

완전히 선인장으로 변한 미영이의 얼굴은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했다.

얼룩덜룩한 흉터 사이 사이로 이전보다 더 빼곡히 들어선 가시가 부릅 일어서 금방이라도

발사될 듯이 저마다 앞을 향하고 있었다.

 

" 미영아, 슬퍼서 그래? 친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니 많이 슬픈 모양이구나…

얘들아! 우리 박수를 한 번 더 쳐서 미영이가 인사를 할 수 있도록 힘을 줄까? 자, 박수! "

 

미영이와 반 아이들 사이에 감도는 살기를 알 리 없는 선생님이 눈치 없이 박수를 유도하자,

어쩔 수 없이 몇몇이 박수를 따라쳤지만 그 소리는 금세 다시 멎었다.

선생님은 그저 서로 아쉬워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면서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 우선… "

 

그 말에 아이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미영이가 작별 인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문지현도 그와 동시에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선인장을 키우다가 물 주는 걸 잊어 죽여버린 아이에게 부모가 '선인장은 잘 키우고 있는 거니?'하고

물어본다면 아마 그런 표정을 지을 것이다. 

무언가 소중한 걸 놓쳐버리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졌을 때…

 

" 너희에게… 고마워… 소중한… 추억이고… 평생… 잊지 못할 거야… "

 

… 착잡한 분위기가 교실을 맴돈다.

선생님 혼자만 모르고 있다. 이 교실에 가득 찬 광기가 빠져나갈 곳을 잃고 뱅글뱅글 돌고 있다.

말하는 미영이, 듣는 급우들 모두 미쳐버리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 나는… 선인장 같은 애였잖아… 그거 알지… 선인장은 물 잘 안 줘도… 살고…

햇빛도… 적당하게… 비료 안 줘도… 잘 살아… 생명력이… 좋은 애야… "

 

그 말에 모두가 책상 밑으로 손발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행위에 가담했던 애들은 '저년이 모든 걸 까발리고 도망가면 어떡하지?'하며

그제야 양심의 가책과 동시에 죄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었고,

그 행위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멀리서 방관했던 나 같은 사람들은 차마 미영이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너는 그때 뭘 하고 있었어?' '너는 왜 잘못된 걸 알면서도 돕지 않았어?'라며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심판을 받고 있었다.

 

" 특히… 선인장엔… 열매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있지? 나는… 내가 없는 쪽인 것 같은데…

너희 생각은… 어떠니…? "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로 떨고 있었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사죄한들 전혀 전달되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빌고 빌었다.

언뜻 게슴츠레 바라본 문지현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 원래 선인장의 가시는… 잎이었다고 해… 그걸 변하게 한 건 사막이래…

자신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 모두와 멀어진 거래… 만약 모두가 선인장을 아끼고 사랑해줬다면…

선인장에게 가시가 필요 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어… "

 

그 대목에서 나는 미영이의 학기 초 성격이 떠올랐다.

자신의 외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모 불평이나 부모님 탓을 하지 않던 모습.

여드름 하나만 나도 여드름 많았다던 아빠 탓을 하는 나와는 비교되던 그 모습.

친구들에게 너스레 좋게 다가오고, 공부도 열심히 하던 평범한 학생이던 미영이…

그런 미영이의 잎사귀 같던 마음을 점점 가시로 변하게 한 건,

미영이라는 이름의 선인장 자신일까, 아니면 우리라는 이름의 사막일까?

 

" 선인장이 사막을 떠나면… 또 다른 잎사귀가 가시로 변하는 건 아닐까…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해… 다들… 안녕… "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선생님과 함께 미영이가 교실 밖으로 나간 뒤였다.

선인장은 그렇게 사막을 떠났다. 

미영이가 전학을 간 이유에 대해선 본인의 언급이 없어 저마다 그저 추측할 뿐이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막' 때문이라는 결론만이 나왔지만 미영이에 대한 언급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문지현이 병적으로 미영이의 흔적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괴롭혀놓고 이제 와서 귀신도 아니고

자기가 괴롭히던 애를 무서워한다고 우리끼리는 뒤에서 쑥덕거렸지만, 

우리도 미영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꺼림칙했기에 자연스레 그 일련의 사건들은 금기가 되었다.

제2의 미영이가 나오는 일은 다행히 없었고, 선생님들 모두가 우리 반을 칭찬하기 바빴다.

급우들끼리 사이도 좋고, 사고 치는 애들도 없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쩜 이렇게 애들이 예쁘냐며.

 

그 뒤 1년을 마치고 다음 학년에 반은 다시 뒤섞였고, 나는 송세희와 같은 반을 한 번 했는데,

송세희는 그 해부터 학교를 자주 빠지다 결국 고등학교에선 퇴학을 당했고 20살을 넘긴 지금 들려오는 

소식으로는 어느 클럽 죽순이가 되어 거의 매일 다른 남자에게 안겨나간다는 근황을 전해 들었다.

문지현은 원래 성적이 좋았던데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론 완전히 공부에만 집중했고

서울의 모 여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나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국립대인 우리 학교의 일어일문학과에 진학했는데,

대학생이 되어 중학생 시절의 기억은 이제 여간해선 떠올리지 않는 일상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지금 졸업앨범에도 나오지 않는 미영이의 기억을 굳이 떠올리는 이유는 이 역시도 그 근황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너 선인장 기억해? 걔 너희 대학 옆에 D대학 의료장비학과 다닌다더라?

어떻게 아냐고? 걔 거기서도 유명하다는데? 당연히 얼굴 때문이지… 완전 아싸래.'

 

지하철로 2 정거장, 도보로 걸어서도 충분히 갈만한 거리에 그녀가 있다…

가끔 그녀를 누군가 회고하거나,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뉴스, 심지어는 길거리의 선인장 화분을 보면서도

나는 늘 죄책감에 시달려야했다. 그녀가 떠나가기 전에 사과했어야만 했다.

나는 직접 괴롭히지 않았으니까 죄가 없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니야.

'방관해서 미안합니다, 이기적이었던 저를 반성합니다.' 그녀 앞에서 직접 사과해야 해.

그녀가 받아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만이 속죄를 떠나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야.

그렇게 생각해왔던 날들을 지나 비로소 그녀의 근황을 들으니 길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D대학 의료장비학과라고 했지.

가자. 사과하자. 

방관자로서 살아왔던 지난 짐을 떨쳐내러 가자…

 

 

정말 얼마 걸리지 않아 D대학 입구에 도착해있었다.

그리 어렵지 않은 대학 구조 덕에 금세 의료장비학과가 속한 학부의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미영이를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일단 그 전에 몇 가지를 더 물어봐야겠어.

저기 내려오는 여대생 둘… 금방 강의를 듣고 내려오는 길인 것 같은데, 이 대학 사람이겠지.

 

" 저기요, 실례할게요, 이 대학 다니시는 분 맞으시죠? "

 

" 네. 맞는데요. "

 

" 혹시… 황미영이라고 여기 대학 다닌다는데… "

 

" 황미영?… 아~! 고슴도치! "

 

고슴도치?

그 순간에 나는 망치로 머리를 맞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 그 사람 찾으세요? 어디서 오셨길래? 혹시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서 나오셨어요? "

 

그 말과 동시에 깔깔 웃어대는 두 여대생을 바라보며 나는 다른 사람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 아! 마침 저기 오네요! 저기 가보세요. 본인이에요. 으, 징그러… 저는 그냥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

 

… 저 멀리 익숙한 느낌의 여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선인장'이라기보단, '고슴도치'에 가까웠다.

뒤통수를 넘어 목덜미까지, 어쩌면 등 밑까지도 가시가 돋아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압도적으로 늘어나 목까지 퍼져버린 가시가 삐죽삐죽 솟아있었다.

가시는 더욱 길어져, 왜 그녀가 '고슴도치'로 불리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고슴도치… 고슴도치… 고슴도치…

그녀에게 사과하러 왔단 사실마저 망각해버렸다.

머릿속에 온통 '고슴도치'라는 단어와 미영이의 지금 모습만이 번갈아가며 맴돌았다.

그녀는 결국 사막을 떠나서도 행복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녀는 괴로워해 왔다.

그저 옛날의 일을 사과하러 온 나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그녀가 고슴도치가 되도록 지금껏 그녀는 매일 매일을 괴로워하며 살아온 것이다.

나에겐 끝난 일이었던 옛날의 일들이 지금까지도 이어졌고,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선인장'이 '고슴도치'가 되도록 괴로워해 왔을 그녀의 지난 세월을 생각하니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과하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왔지만 지금 그녀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었다.

미영이가 점점 가까워졌지만 그럴수록 내 시선은 아래로 내려갔다.

혹시 그녀가 날 알아본다면 날 몹시 원망하고 있을까,

내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와있는 거지, 

더는 머뭇거릴 수조차 없었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렸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선인장은 아직도 사막에 있었기 때문에…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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